땅콩.
이 서신을 언젠가 보겠거니 하면서 써 보기로 하자.
그 첫번째 이야기.
엄마는 이악스러운 사람을 싫어한단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앞 뒤 잴것없이 몰염치한 사람. 남에게 티끌만큼도 양보할 수 없다는 기세로 덤비는 사람. 엄마는 그런 사람을 참 싫어한다.
그래서 가끔 엄마는 엄마가 이해할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서는 욕심을 땅콩이 부릴때, 참아주지 못하기도 한단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한다. 이악스럽지 않기 위해서 사람에게는 무엇이 있어야 할까. 보통 사람들은 그것이 여유라고 얘기한단다. 자기가 가진것이 많을때 남에게도 여유를 부릴 수 있다는 것이지. '여유'에는 보통 경제력이라고 하는 눈에 보이는 가치들이 포함된단다.
여유가 있어야 이악스럽지 않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러나 엄마가 살아본 바로는 그 '여유'는 마음에서 연유하는 경우가 결정적이더라. 많이 갖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고 싶을 만큼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 사람들은 자기 이익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으로만 측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더라.
그러나 물질적이라는 것은 또한 작은 부분이 아니더라. 먹고 살기가 전쟁같은 이들에게 마음의 여유는 사치와 같은 것이더라. 이악스러워지지 않으면 단 한끼의 밥도 제 목구멍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단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교양과 인격조차도 (잔인하게도) '세습'되고 있다 말하기도 한다. 땅콩이 이해하기에 어려운 단어인 '세습'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좀더 자세하게 엄마 생각을 일러 주기로 하고, 오늘은 간단하게 이렇게 설명할께. 내가 가진것을 딸이나 아들에게 전해주는 것. 이정도.
그래서 물질의 여유와 마음의 여유의 차이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겠지만, 정말 가질 수 없기때문에 이악스러움조차 세습당하는 사람들의 차이에 대해서도 언제나 생각해 봐야 한단다. 그런 모든 걸 고려할 수 있어야, 땅콩은 이악스럽게 살지 않을 수 있겠지. 때로는 이악스러운 이들의 욕망을 이해하고 보듬어 줄 수도 있겠지. 그건 엄마가 죽었다 깨도 하지 못했던 일이란다. 엄마는 싫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편협하고 못돼먹은 사람이거든.
내가 가진 것을 양보할 수 있는 마음. 나보다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더욱 관대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 때로는 내가 너무나 가지고 싶지만 양보해야할때 깨끗하게 툭툭 양보할 수 있는 여유. 그리고 돌아서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들에 감사할 수 있는 깊은 아량. 그것을 땅콩이 가지게 되면 엄마는 더할 나위없이 행복해질 것 같다.
물론 불의 앞에 자신의 신념을 양보해서는 안되며, 잘못된 권력 앞에 무릎을 꿇으며 그것이 양보의 미덕이라 자신의 마음을 배신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양보해야할 것은 자기 자신의 욕망과 관련된, 삶을 풍요롭게 할 성찰의 목록들이란다.
어느날 엄마는 땅콩에게 줄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무엇을 너에게 남겨줄 수 있을까. 사람의 떠남은 태어남처럼 예정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평생을 죽지 않을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엄마는 (소망하기에) 너보다 먼저 떠날 사람이기에 너한테 남겨줄 것이 필요했다.
이제 가끔. 소란하고 복잡한 시간 틈틈히 남겨줄 만한 이야기를 적는다. 이 이야기를 모두 읽고 이해하는 날이 언젠가는 올것이고, 그때면 엄마는 땅콩이 엄마가 끊임없이 갈등하고 주저앉고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불완전한 하나의 사람이었다는 걸 기억하면서, 웃고, 울기도 하고 든든해하기도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하면서 또한 깊이 사랑해 주리라 생각하며 첫 글을 남긴다.
양보하라. 내 딸. 그 마음의 여유를 위해서.
이 서신을 언젠가 보겠거니 하면서 써 보기로 하자.
그 첫번째 이야기.
그래서 가끔 엄마는 엄마가 이해할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서는 욕심을 땅콩이 부릴때, 참아주지 못하기도 한단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한다. 이악스럽지 않기 위해서 사람에게는 무엇이 있어야 할까. 보통 사람들은 그것이 여유라고 얘기한단다. 자기가 가진것이 많을때 남에게도 여유를 부릴 수 있다는 것이지. '여유'에는 보통 경제력이라고 하는 눈에 보이는 가치들이 포함된단다.
여유가 있어야 이악스럽지 않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러나 엄마가 살아본 바로는 그 '여유'는 마음에서 연유하는 경우가 결정적이더라. 많이 갖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고 싶을 만큼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 사람들은 자기 이익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으로만 측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더라.
그러나 물질적이라는 것은 또한 작은 부분이 아니더라. 먹고 살기가 전쟁같은 이들에게 마음의 여유는 사치와 같은 것이더라. 이악스러워지지 않으면 단 한끼의 밥도 제 목구멍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단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교양과 인격조차도 (잔인하게도) '세습'되고 있다 말하기도 한다. 땅콩이 이해하기에 어려운 단어인 '세습'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좀더 자세하게 엄마 생각을 일러 주기로 하고, 오늘은 간단하게 이렇게 설명할께. 내가 가진것을 딸이나 아들에게 전해주는 것. 이정도.
그래서 물질의 여유와 마음의 여유의 차이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겠지만, 정말 가질 수 없기때문에 이악스러움조차 세습당하는 사람들의 차이에 대해서도 언제나 생각해 봐야 한단다. 그런 모든 걸 고려할 수 있어야, 땅콩은 이악스럽게 살지 않을 수 있겠지. 때로는 이악스러운 이들의 욕망을 이해하고 보듬어 줄 수도 있겠지. 그건 엄마가 죽었다 깨도 하지 못했던 일이란다. 엄마는 싫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편협하고 못돼먹은 사람이거든.
내가 가진 것을 양보할 수 있는 마음. 나보다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더욱 관대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 때로는 내가 너무나 가지고 싶지만 양보해야할때 깨끗하게 툭툭 양보할 수 있는 여유. 그리고 돌아서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들에 감사할 수 있는 깊은 아량. 그것을 땅콩이 가지게 되면 엄마는 더할 나위없이 행복해질 것 같다.
물론 불의 앞에 자신의 신념을 양보해서는 안되며, 잘못된 권력 앞에 무릎을 꿇으며 그것이 양보의 미덕이라 자신의 마음을 배신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양보해야할 것은 자기 자신의 욕망과 관련된, 삶을 풍요롭게 할 성찰의 목록들이란다.
어느날 엄마는 땅콩에게 줄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무엇을 너에게 남겨줄 수 있을까. 사람의 떠남은 태어남처럼 예정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평생을 죽지 않을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엄마는 (소망하기에) 너보다 먼저 떠날 사람이기에 너한테 남겨줄 것이 필요했다.
이제 가끔. 소란하고 복잡한 시간 틈틈히 남겨줄 만한 이야기를 적는다. 이 이야기를 모두 읽고 이해하는 날이 언젠가는 올것이고, 그때면 엄마는 땅콩이 엄마가 끊임없이 갈등하고 주저앉고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불완전한 하나의 사람이었다는 걸 기억하면서, 웃고, 울기도 하고 든든해하기도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하면서 또한 깊이 사랑해 주리라 생각하며 첫 글을 남긴다.
양보하라. 내 딸. 그 마음의 여유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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